1. 익숙한 페이더 위로 흐른 30년의 시간
교회 방송실, 모니터 불빛만이 가득한 이 좁은 공간에서 보낸 시간이 벌써 30년이다. 돌이켜보면 참 뜨거웠던 시절이 있었다. 나이 지긋한 목사님들 밑에서 ‘순종’과 ‘충성’이라는 단어가 전혀 무겁지 않았던 청년 시절, 그리고 비슷한 또래의 실무 목회자들과 친구처럼 어울리며 밤을 새워도 마냥 즐거웠던 그 시절 말이다. 그때는 교역자와 기술직이라는 경계가 그리 두껍지 않았다. 우리는 함께 꿈을 꿨고, 우리 교회가 미디어를 가장 잘하는 교회가 되길 바랐으며, 실제로 그런 인정을 받기도 했다. 그 열정이 영원할 줄만 알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십수 년이 지난 지금, 내 손때 묻은 키보드와 마우스 위에는 열정 대신 피로함과 무력감이 조용히 내려앉아 있다. 어느새 내 곁에는 나보다 한참 어린 교역자들이 들어와 있다. 그들에게 나는 ‘같은 팀’이기 이전에 ‘기술을 담당하는 간사’다. 예전처럼 격의 없이 의견을 나누고 싶어도, 내 한마디가 행여나 월권처럼 들릴까 봐 스스로 입을 닫게 된다. 그들을 이해하려 애쓰던 에너지는 어느 순간 조용히 바닥을 드러냈고, 그 자리엔 말할 수 없는 쓸쓸함만 남았다.
2. 퇴보하는 현장, 그리고 유기된 사명
가장 견디기 힘든 건 기술적 퇴보다. 장비는 좋아졌고 세상은 몰라보게 변했는데, 정작 교회 미디어의 완성도는 오히려 예전만 못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예전에는 교역자든 기술직이든 모두가 치열하게 고민하며 최고의 연출을 뽑아내려 애썼다. 하지만 지금의 젊은 사역자들은 이미 잘 갖춰진 시스템 안에 들어와, 기획과 연출의 무게를 깊이 느끼지 못한 채 머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어느 순간부터 예배의 흐름을 설계하는 일들이 슬그머니 내 쪽으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엄밀히 말하면 내 역할 밖의 일들이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해야 했고, 나는 또 조용히 그 자리를 채웠다. 더 나은 방법과 세련된 감각이 머릿속에 그려지지만, 그것을 꺼내놓을 자리가 내게 주어지는지는 늘 불분명하다. 때로는 그냥 흐름에 맡기는 것이 맞지 않을까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하지만, 완성도가 떨어지는 결과물을 바라보는 마음은 여전히 쉽게 편해지지 않는다. 예전의 그 뜨겁던 기억들이 흐릿해지고, 이제는 사고 없이 예배 하나를 마치는 것에 안도하는 현실이 가끔은 서글프게 느껴진다.
3. 생존이라는 이름의 무거운 멍에
세상의 트렌드는 무서운 속도로 변해간다. 30여년 이 자리에서 버텨왔지만, 저 바깥의 속도를 따라가는 것이 예전처럼 쉽지 않다. 젊은 감각들 사이에서 뒤처지지 않으려 애쓰다 문득 거울을 보면, 사명감에 불타던 사역자의 모습은 희미해지고 그저 하루하루를 버텨가는 한 중년의 남자가 서 있다.
하나님의 음성이니, 소명이니 하는 말들이 가끔은 멀게만 느껴진다. 당장 내일의 집회를 준비해야 하고, 내 자리가 어디까지인지 가늠하며 조심스럽게 하루를 보내야 하는 이 현실은 어느 날엔 그저 지독하게 무겁다.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결까”라는 물음이 방송실의 어둠처럼 조용히 나를 감싸는 날도 있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콘솔 앞에 서는 이유
하지만 나는 안다. 내가 이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건 단지 월급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예전 같은 뜨거운 열정은 아닐지라도, 예배의 시작을 알리는 페이더를 올릴 때 내 손끝에 전달되는 그 미세한 떨림은 여전히 살아있고, 그것이 아직도 나의 실존이다.
교역자들이 저마다의 역할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나는 그 빈 공간을 말없이 채운다. 그게 때로는 외롭고, 때로는 억울하기도 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들이 밉지 않다. 그들도 나름의 무게를 지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어린 교역자들이 내 조언을 흘려들어도, 그들이 만든 서툰 영상 뒤에서 묵묵히 소리를 잡고 화면을 전환하는 이 ‘성실함’이야말로, 지금 내가 드릴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예배일지도 모른다. 내 실력이 세상의 트렌드를 완벽히 따라가지 못해도, 수십년간 이 자리를 지켜온 나의 ‘버팀’은 그 자체로 충분한 무게를 지닌다.
5. 나를 향한 다독임: 고독한 등대지기
스스로를 꼰대라고 자책하지 말자. 내가 입을 닫는 건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공동체를 아끼는 마음에서 비롯된 배려라는 걸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신다. 후배들을 보며 답답함을 느끼는 건 내 감각이 여전히 살아 숨 쉰다는 증거이며, 경계 안에서 조용히 감내하면서도 그 자리를 지기는 건 내가 이 교회의 보이지 않는 ‘마지막 보루’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방송실의 불을 끄며 나 자신에게 말해주자. “그동안 참 많이 애썼다. 세상은 변하고 사람들은 떠나가도, 끝까지 이 자리를 지키며 예배에 필요한 빛과 소리를 만들어낸 내 손은 참 아름답다.” 나는 생존을 위해 간신히 버티는 지친 노동자가 아니다. 나는 무너져가는 미디어의 현장에서 홀로 등대를 지키는, 가장 고독하지만 가장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테크니션이다.

댓글 쓰기